나의 이야기
1.
학창시절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공통어가 있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성실하며 타의 모범이 됨’, ‘ 품행이방정하며 성실하여 타의 모범이 됨’,
‘능동적이고 성실하며 매사 솔선수범함’... 달동네를 한걸음에 달려가 서른아홉에 쓰러진
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던 것은 우수한 성적이 아니었다. 성적표에 쓰여 진 담임선생님의
생활기록부 문구들이었다. 어머니의 오랜 지병으로 사춘기를 긴 터널 속에서 지내야했지만
사랑으로 똘똘 뭉친 가족들은 “넌 잘할 수 있어!” 라며 꿈과 희망을 노래하게 했다.
역경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긍정의 힘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훈련 받아온 셈이다.
2.
어려서 달리기를 잘했다.
초 단위의 기록 경신을 위해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은 차라리
쾌감이었다. 팀워크도 그 때 알았다. 때로는 뒤로 물러서서, 때로는 앞으로 치고 나가
바통을 줘야 릴레이의 최고 스피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팀플레이의 보이지 않는
규칙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달리기나 체력장의 악착같은 모습
등등으로 체육학교에 진할 할 뻔도 했지만, 기초 체력 부족으로 체육인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운동은 끈기를 갖게 한 좋은 경험이었지만,
평생 직업으로 할 만큼 특별한 재능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스승이 있었기에 시인이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내게 멘토가 되어준 선생님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문학소녀의 꿈을 발현해 주신 선생님은 당시 모든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차지하고 있던 국어선생님이셨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은 나를 운동장 한켠에 앉혀놓고 성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내 삶의 무게가 많이 무거워 보였는지 선생님은 문예반 가입을 권유하셨고,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글짓기에서 여러 번 상을 타면서 문학도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시인이 되어 세상과 마주하고 있을 때, 참되고 고결한 선생님의 가르침이 더욱 그리워진다.
4.
뜨거운 심장이 시를 쓰게 했다면,차가운 머리는 기자가 되게 했다.
라일락꽃보다 더 향기로운 이십 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전국 곳곳을 뛰어다니며
발로 기사를 썼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민중이 봇물처럼 거리로 뛰어나와 민주화 항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시절, 그러나 그무엇으로도 나를 채우지 못했다. 잡지사 기자의 한계는
나를 무력하고 나약하게 했다. 그 무렵, KBS 방송국 프로그램 제작팀에서 합류 권유를 받았다.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으로 일주일쯤 꼬박 고민에 빠졌다가 단호히 내린 결론은
“그래 떠내려가도 좋으니 큰물에 가서 놀자” 였다. 그동안 익숙해진 모든 것들을 다 털고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무지막지한 경쟁의 세계로 선뜻 들어선 것이다.
5.
절대 길을 묻지 않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주저거림이 없다. 못해도 해야 하고 몰라도 알아야 한다.방송국에 처음
들어와 그 누구도 프로그램 제작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들은 내가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제작에 합류 제의를 받
고 처음 ‘생방송 큐’ 라는 어린이 프로를 맡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큐시트를 써본 일이 없
었던지라 기자로서의 펜 솜씨 하나만 믿고 깡다구 있게 들이 민 것이다. 일일이 손으로 큐
시트 용지에 대본을 써내려갔던 시절,사실 큐시트 용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몰랐다.
하루는 남들이 다 가고 난 후 팀에 남아 있는 큐시트를 죄다 꺼내 읽어나가면서 메모를 시
작했다. 큐시트 쓰는 법을 독학으로 공부한 셈이었다.그 후 생방송을 맡아 첫 대본을 써야
했는데, 아뿔싸 대본이 아슬아슬한 시간에 나와 스텝들 모두를 초긴장 상태로 내몰았다. 내
손끝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상태에서 무뎌진 속도는 누군가 “괜찮아” 라는 단 한마디로 다시
필을 받아 날랐다. 다행히 방송 펑크 없이 진행되었지만 앞이 캄캄하고 샛노래져 쥐구멍에
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잘 썼다”는 칭찬으로 잔혹한 경쟁의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
을 수 있었고, 강심장도 그 때 얻었다. 지금은 방송작가협회가 생겨 배움의 길들이 열려있
지만 1980년대 초 방송작가들은 혼자서 프로그램 아이템 제안, 기획, 출연자 섭외, 대본집
필, 편집 등등을 거의 혼자 운영하는 능력자들만이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6.
인맥 구성을 위해 투자하다.
이십대 때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배웠다면 삼십대는 그 전략을 펼칠 수 있는 무
대 세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나갔다. 그 일한으로 사단법인 단체에서의 기획실무자로서의
역할은 학문에 정진할 시간과 인맥 네트워크 형성 그리고 문화예술기획자로서의 전문영역을
구축하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기간이었다.
7.
브랜드가 되다.
“여자지만 사회에 나가 능력을 펼 수 있는 사회인이 되거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어려서
부터 귀딱지에 눌러 붙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브랜드는 늘 첫 번째 화두였다. 브랜드가 되
기 위해서는 큰 산맥에 부딪혀 살아남아야 한다.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일기 쓰는 리더] 등등의 저술과 십수년간 문화예술기획 경영의
현장 경험은 차별화된 브랜드 가치를 쌓는 초석이 되었다.
8.
기여를 통한 가치창조의 일원이 되다.
40라운드를 만들면서 기여를 통한 가치창조의 일원이 되었다. 21세기는 나눔을 통한
브랜드 포지셔닝의 시대다. 최고의 브랜드들이 포진해있는40라운드의 네트워크는
서로에게 전문성을 아낍없이 나눠, 그 이상의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21세기 팝업비지니스시대에 선택된 모델이다.
꿈을 꾸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듯이 전문 “문화예술행정경영인”이 되어
문화예술기관의 전문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나의 꿈이며, 도전이며, 미래다.
9.
두려움이 없는 발광(發光)의 언어로 산에 오르다.
1.
학창시절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공통어가 있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성실하며 타의 모범이 됨’, ‘ 품행이방정하며 성실하여 타의 모범이 됨’,
‘능동적이고 성실하며 매사 솔선수범함’... 달동네를 한걸음에 달려가 서른아홉에 쓰러진
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던 것은 우수한 성적이 아니었다. 성적표에 쓰여 진 담임선생님의
생활기록부 문구들이었다. 어머니의 오랜 지병으로 사춘기를 긴 터널 속에서 지내야했지만
사랑으로 똘똘 뭉친 가족들은 “넌 잘할 수 있어!” 라며 꿈과 희망을 노래하게 했다.
역경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긍정의 힘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훈련 받아온 셈이다.
2.
어려서 달리기를 잘했다.
초 단위의 기록 경신을 위해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은 차라리
쾌감이었다. 팀워크도 그 때 알았다. 때로는 뒤로 물러서서, 때로는 앞으로 치고 나가
바통을 줘야 릴레이의 최고 스피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팀플레이의 보이지 않는
규칙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달리기나 체력장의 악착같은 모습
등등으로 체육학교에 진할 할 뻔도 했지만, 기초 체력 부족으로 체육인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운동은 끈기를 갖게 한 좋은 경험이었지만,
평생 직업으로 할 만큼 특별한 재능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스승이 있었기에 시인이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내게 멘토가 되어준 선생님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문학소녀의 꿈을 발현해 주신 선생님은 당시 모든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차지하고 있던 국어선생님이셨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은 나를 운동장 한켠에 앉혀놓고 성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내 삶의 무게가 많이 무거워 보였는지 선생님은 문예반 가입을 권유하셨고,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글짓기에서 여러 번 상을 타면서 문학도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시인이 되어 세상과 마주하고 있을 때, 참되고 고결한 선생님의 가르침이 더욱 그리워진다.
4.
뜨거운 심장이 시를 쓰게 했다면,차가운 머리는 기자가 되게 했다.
라일락꽃보다 더 향기로운 이십 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전국 곳곳을 뛰어다니며
발로 기사를 썼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민중이 봇물처럼 거리로 뛰어나와 민주화 항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시절, 그러나 그무엇으로도 나를 채우지 못했다. 잡지사 기자의 한계는
나를 무력하고 나약하게 했다. 그 무렵, KBS 방송국 프로그램 제작팀에서 합류 권유를 받았다.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으로 일주일쯤 꼬박 고민에 빠졌다가 단호히 내린 결론은
“그래 떠내려가도 좋으니 큰물에 가서 놀자” 였다. 그동안 익숙해진 모든 것들을 다 털고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무지막지한 경쟁의 세계로 선뜻 들어선 것이다.
5.
절대 길을 묻지 않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주저거림이 없다. 못해도 해야 하고 몰라도 알아야 한다.방송국에 처음
들어와 그 누구도 프로그램 제작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들은 내가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제작에 합류 제의를 받
고 처음 ‘생방송 큐’ 라는 어린이 프로를 맡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큐시트를 써본 일이 없
었던지라 기자로서의 펜 솜씨 하나만 믿고 깡다구 있게 들이 민 것이다. 일일이 손으로 큐
시트 용지에 대본을 써내려갔던 시절,사실 큐시트 용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몰랐다.
하루는 남들이 다 가고 난 후 팀에 남아 있는 큐시트를 죄다 꺼내 읽어나가면서 메모를 시
작했다. 큐시트 쓰는 법을 독학으로 공부한 셈이었다.그 후 생방송을 맡아 첫 대본을 써야
했는데, 아뿔싸 대본이 아슬아슬한 시간에 나와 스텝들 모두를 초긴장 상태로 내몰았다. 내
손끝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상태에서 무뎌진 속도는 누군가 “괜찮아” 라는 단 한마디로 다시
필을 받아 날랐다. 다행히 방송 펑크 없이 진행되었지만 앞이 캄캄하고 샛노래져 쥐구멍에
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잘 썼다”는 칭찬으로 잔혹한 경쟁의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
을 수 있었고, 강심장도 그 때 얻었다. 지금은 방송작가협회가 생겨 배움의 길들이 열려있
지만 1980년대 초 방송작가들은 혼자서 프로그램 아이템 제안, 기획, 출연자 섭외, 대본집
필, 편집 등등을 거의 혼자 운영하는 능력자들만이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6.
인맥 구성을 위해 투자하다.
이십대 때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배웠다면 삼십대는 그 전략을 펼칠 수 있는 무
대 세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나갔다. 그 일한으로 사단법인 단체에서의 기획실무자로서의
역할은 학문에 정진할 시간과 인맥 네트워크 형성 그리고 문화예술기획자로서의 전문영역을
구축하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기간이었다.
7.
브랜드가 되다.
“여자지만 사회에 나가 능력을 펼 수 있는 사회인이 되거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어려서
부터 귀딱지에 눌러 붙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브랜드는 늘 첫 번째 화두였다. 브랜드가 되
기 위해서는 큰 산맥에 부딪혀 살아남아야 한다.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일기 쓰는 리더] 등등의 저술과 십수년간 문화예술기획 경영의
현장 경험은 차별화된 브랜드 가치를 쌓는 초석이 되었다.
8.
기여를 통한 가치창조의 일원이 되다.
40라운드를 만들면서 기여를 통한 가치창조의 일원이 되었다. 21세기는 나눔을 통한
브랜드 포지셔닝의 시대다. 최고의 브랜드들이 포진해있는40라운드의 네트워크는
서로에게 전문성을 아낍없이 나눠, 그 이상의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21세기 팝업비지니스시대에 선택된 모델이다.
꿈을 꾸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듯이 전문 “문화예술행정경영인”이 되어
문화예술기관의 전문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나의 꿈이며, 도전이며, 미래다.
9.
두려움이 없는 발광(發光)의 언어로 산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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