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을 기획하게 된 동기는 너무나 간단 명료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양분화된 민심속에
지성인들조차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이 시대의 집단지성에 대한
염증을 느꼈었다. 무엇이 이 시대 지성인들을 침묵하게 하는가? 라는 화두를 통해 이 시대
오피니언리더들의 실체를 보게되었다.
물론 보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는 다들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두려운 미래를 향해 아무도 발 들여
놓지 않는다면 우리 미래는 퇴보할 뿐만 아니라 심한 갈등과 분열과 대립으로 고립될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도전정신을 강조한다. 그것만이 미래를 꿈꾸게 하고 개척하게 하고
선점하게 하는 것이기 떄문이다.
지금 필자는 미래의 발전을 위해 브랜드네트워크를 결성 최고의 집단지성을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만이 미래가치를 좀더 강렬하게 도전하는 포스가 될것이라 믿기 떄문이다.
이 책은 당시 김영호, 장원재, 김배균, 조전혁, 이광명 교수가 참여하여 역사적 사실을 정치학적, 경제학적, 문화적 그리고 공법 등 세분화하여 고찰, 역사적 상황을 가감없이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다음 글은 250년 만에 서로 다른 문화권의 두 나라가 교류와 소통을 하는 역사적인 유로터널의 사례를 통해
반대했지만 성공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공감하고자 한다. 택스트가 다소 길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한 편의 소설을 읽듯 부담없이 읽을 수 있기에 소개한다.
5. 250년 꿈을 실현한 유로 터널
백년전쟁의 상흔
1990년 영국과 프랑스 기술자들은 도버 해협 해저에서 만나 양국의 국기를 교환하면서 벅찬 감격을 나눴다. 그러나 이날 감격의 순간은 그동안 논쟁을 거듭해온 영국과 프랑스 국민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금세기 최대의 토목 공사로 최첨단 기술의 상징인 해저 터널이 뚫리는 순간 유럽대륙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며 감격의 순간을 맞이했다.
1986년 2월 12일 영국의 대처(Margaret Thatcher) 수상과 프랑스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이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유로 터널 조약을 체결, 각각 서명함으로써 이뤄진 유로터널은 프랑스 칼레와 영국 폭스턴 사이의 해저 총 50km를 연결한 것이다.
터널이 완공됐을 당시의 감격은 터널 건설을 거세게 반대했던 사람들로 인해 더욱 값지게 나타났다. 당시 터널 건설에 반대한 영국 사람들은 성당 밖에서 격렬하게 항의했고, 그들이 타고 온 리무진에 계란 세례를 퍼붓기도 했다. 영국인들과는 달리 프랑스인들은 터널 건설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영불 해저 터널 건설을 위해 양국 기업들 사이의 컨소시엄이 형성되어 일반 대중 소액 주주를 대상으로 투자 유치를 벌였다. 이때 참여한 소액 주주는 모두 63만 6,000명이었는데 그 중 프랑스인이 70%, 영국인이 30%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터널 건설에 대한 영국인들의 반대를 알 수 있다.
영국인들이 유로 터널 건설에 반대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유럽 대륙과 터널로 연결됨으로써 섬나라 영국의 정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동안 영국은 ‘화려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이, 섬이라는 특유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제국으로의 발판을 마련해왔다.
영국이 추구한 고립주의 정책의 핵심은 평상시에는 유럽 대륙의 국가들과 동맹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 대륙 전체를 지배하려는 패권적 욕구를 가진 국가가 등장하여 영국의 국익이 위협받을 경우에는 주도적으로 나서서 이 국가에 대항하는 연합을 형성하여 그 패권적 욕구를 좌절시켰던 것이다.
고립은 영국에 정책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던 것이다. 영국의 고립주의는 유럽 대륙 국가들이 서로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념이 없을 때, 여분의 국력을 바탕으로 해외로 진출하여 식민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은 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팍스브리태니카(Pax Britanica)를 열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에 익숙한 영국인들에게 터널을 통해서 유럽 대륙과 직접 연결된다는 것은 섬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육지에서 사는 것과 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섬나라로서 유럽 대륙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침략을 받아왔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에 의해 영국의 안전은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특히 역사적으로 1066년 노르만 정복에 의해 윌리엄 1세가 노르만 왕조를 창건한 이후 노르망디의 ‘고토 회복’에 대한 집념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년)을 겪었다.
이러한 외적 침략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국가로서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대륙과 별개의 섬나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영국인들은 믿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을 결성, 각 국가들 사이의 전쟁 가능성은 희박해져 가고 있으며, 그 누구도 영국과 프랑스가 21세기에 타협과 협상이 아닌 전쟁을 통해 두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섬나라로서의 고립적 위치가 가져다준 안정감이 터널을 통해서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 터널 건설에 반대했던 것이다.
뜨거운 찬반 논쟁
테러의 위협에 대한 우려는 터널 건설 반대의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었다. 화물과 짐에 대한 철저한 검색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테러 행위를 막는다는 것은 최근 국제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테러 위험에 비추어볼 때 쉽지 않은 일이다. 테러로 인하여 터널 내에서 폭탄이 터진다고 하더라도 터널 내부로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건설 회사들은 설득했지만, 테러에 대한 우려는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터널 건설로 인하여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영불 해협을 오가는 페리를 운영하는 사업자들이었다. 영국 항구 화물 하역 회사들은 유로 터널이 개통될 경우 세계 운송 회사들이 화물을 영국 항구로 가져오지 않고 프랑스 항구로 가져가 유로 터널의 화물 기차를 통해서 영국으로 가져오게 되면 커다란 피해를 볼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영국인들은 유로 터널을 통해서 광견병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질병들이 영국으로 퍼질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같은 유로 터널 건설에 대한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처 수상은 영국이 더 이상 유럽 대륙으로부터 고립되어 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지도자의 통찰력은 유럽 통합의 평화적 측면에 대한 확신의 결과였다. 또한 대처 수상은 터널 건설을 국가 주도가 아니라 민간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강조했다.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이 영국 국민들의 수많은 반대를 극복하고 유로 터널 건설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미래에 대한 지도자의 자신 있는 통찰력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유럽 통합의 시발점
그동안 섬나라인 영국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키는 것은 모든 엔지니어들의 꿈이었다. 두 나라를 연결시키는 방법도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해저 터널, 교량, 잠수 튜브 등 실제적으로 적용 가능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도버 해협의 해저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을 하나로 잇고자 한 본격적인 시도는 나폴레옹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두 나라를 잇는 해저 터널에 대한 최초의 건설계획은 1802년 프랑스 엔지니어인 마티외(Albert Mathieu Favier)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도로 된 해저 터널 건설계획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터널 중간 지점에 인공섬을 두어 이곳에서 우편물을 나르는 말을 교대시키게 하였고, 오일 램프로의 터널 조명과 바다 위로 솟아난 굴뚝을 통해서 환기를 하게끔 고안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이 계획을 보면 터널을 통과하는 마차의 소요시간은 약 2시간으로 산정되어 있다.
당시 마티외의 생각은 프랑스 제1대 집정관이었던 나폴레옹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미앵 강화 조약에서 영국의 정치가 폭스(Charles James Fox)는 두 나라가 함께 협력하면 추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터널 계획을 수락했으나, 곧 양국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자연스레 물거품이 되었다.
이듬해 1803년 프랑스의 테셔 드 모틀레가 주물철로 만든 파이프를 바다 밑에 묻어 터널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덕도와 거제도를 잇기 위한 GK 프로젝트에 적용되고 있는 ‘침매 터널’과 유사한 것으로서 획기적인 제안이었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추진하기 힘든 일이었다.
1833년에 프랑스의 젊은 토목 기술자인 드 가몽(Aime Thome De Gamond)은 두 나라를 잇는 터널 건설계획에 많은 관심을 갖고 34년 동안 해결 방안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해갔다. 우선 그는 직접 수십 번의 잠수를 통해 수심 측량을 하고 해저의 등고선 지도를 만들었다. 또한 해저 지층이 터널 굴착에 적합한 백악기층이란 사실을 밝혀내어 해협 아래로 터널을 뚫을 수 있다고 확신하여 터널 계획을 제안했다.
1856년에 드 가몽은 나폴레옹 3세를 알현하여 터널 계획을 설명하고, 나폴레옹 3세로 하여금 해저 터널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과학위원회를 만들게까지 했다. 과학위원회는 드 가몽의 계획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더 많은 기술적인 정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더구나 기술적인 세부 설계에 앞서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예비 협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위원회의 반응에 드 가몽은 영국의 유명한 공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렇지만 1858년에 드 가몽이 영국을 방문하면서 만난 로드 파머스톤 수상은, 지금도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거리를 더 가깝게 하는 공사에 참여해달라고 한다는 핀잔의 말로써 섬 상태 그대로 영국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많은 영국인들의 의견을 대변했다. 더욱이 같은 해 버밍엄제 폭탄으로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어 프랑스에서도 해저 터널에 대한 관심이 식어버렸고, 대륙의 침략에 대한 영국인들의 공포도 다시금 살아났다.
그러나 기술자들의 해저 터널에 대한 연구는 끊이지 않았다. 영국의 웨일즈에서 석탄 광산과 그 환기 문제에 관하여 많은 경험을 쌓은 영국 공학자 로(William Low)는, 단선 철도가 나 있는 터널 한 쌍을 만들고 중간 지점을 서로 교차하도록 해서 두 터널을 연결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로의 아이디어는 한 세기가 지난 다음 유로 해저 터널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1870년대 초가 되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로의 제안에는 원칙적인 합의를 했지만, 어느 쪽도 재정 충당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로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철도 부설업자이던 에드워드 왓킨 경(Sir Edward Watkin)이었다. 왓킨 경은 1880년에 시험 삼아 약 800m를 굴착하여 해저 아래의 지층인 전기 백악층의 특성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 터널 굴착 작업에 사용된 굴착 기계의 특허를 낸 사람은 보먼트 대령이라고 하지만, 설계는 토마스 잉글리시였다. 이 기계는 압축공기를 써서 칼날을 회전시키고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로 화젯거리였다. 왓킨 경은 1882년 초에는 거의 1km까지 파나갔다.
하지만 기술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앨버트 왕자가 사망한 뒤 빅토리아 여왕은 다소 의기소침해졌다. 이 기회를 틈타 윌리엄 글래드스톤 수상은 ‘행복한 영국’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이 일에 보류 의사를 표명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런던 타임스〉지는 사설에서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무서운 배멀미에서 승객들의 위를 편하게 해방시킬 수 있기에 이 설계는 훌륭하지만, 국가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언론까지 언급하고 나오는 바람에 잠잠해져 있던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 또다시 터널 건설을 반대하는 대규모 운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군부도 가담하여 조국 방위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도버 해협의 해저 터널을 건설하게 된다면 프랑스가 침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국가안보를 다시금 들춰냈다. 종교 관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이 밀려 들어오면 풍기가 문란하게 되어 영국의 순수성이 침해당한다고 강력하게 항의, 반대운동에 힘을 실었다. 이같은 반대를 이유로 1883년 영국 의회는 터널의 건설 중지를 의결하여 공사가 무기한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유럽 대륙을 잇는 부푼 꿈이 하루아침에 무산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도
영불 해협 터널 계획이 흐지부지된 것은 대부분 영국의 반대에 의해서였다. 반대의 여러 이유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국방상 안전 문제였다. 건설 기술자들이 영국 쪽 입구에 방어용 요새를 만들면 적이 쳐들어와도 터널을 봉쇄할 수 있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외국인 혐오증에 걸린 영국인들의 불안감을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당시의 풍자만화에는 프랑스군의 침공에 잔뜩 겁먹은 영국민의 모습이 수없이 그려져 있다. 놀랍게도 1880년대 공사가 중단된 해저 터널은 현존하고 있다. 그 시대에 발달한 굴착 기계는 원리로 보면 현대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또한 기술적인 면만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이미 1880년에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터널을 파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 1922년에 포크스톤에서 휘태거가 발명한 보링 머신에 의한 128m의 시험 굴착이 실시되었으나, 정치적 반대에 의해 또다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후 20년간 건설 찬반 논쟁으로 덧없이 시간만 지나가고, 유명한 정치인 윈스턴 처칠과 베번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영국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 터널 건설에 적극적이었던 프랑스는 영국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 해안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바다에 터널 출구를 하나만 만들고, 출구와 연안 철도 사이는 말발굽 모양의 거대한 고가다리로 연결하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영국 함대가 진입로를 통제하고, 필요할 경우 접근할 수 없도록 포격도 할 수 있게 만들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 비행기의 등장으로 인해 섬이라는 영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더 이상 방어적으로 이점을 갖고 있다는 생각들이 상당히 희석되었다. 전쟁이 끝난 1920년대 후반에 터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지만, 1930년대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해 이 논의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터널에 대해 거론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승자도 패자도 모두 조국의 재건이 더 시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터널에 관한 자료가 유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이 되자 터널 건설에 자금을 모으는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1957년에는 터널 문제를 다시 검토하기 위해 영불 연합으로 채널 터널 스터디그룹이 발족되었다. 해양·지질·경제·공학 측면에서 합동 연구가 수행되었으며, 1960년 이 연구 그룹에 의해 포크스톤에서 상 가트를 연결하는 터널 건설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에 가장 반대 목소리가 컸던 쪽은 재정이었다. 이 연구 그룹의 원래 제안은 민간 자본으로는 터널만 만들고,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진입로와 보조 설비, 공채를 발행해 조달하는 것이었다. 열띤 반대 여론 속에서 공공 부분의 투자를 최소화해 터미널과 진입로에 이르기까지를 민간 자본으로 조달하는 것에 동의했지만, 결국 이것마저도 불발로 돌아갔다.
1970년대 중반 들어 영국과 프랑스가 조약 형식으로 예비 계약을 맺고 해협 양안에서 공사가 또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섹스피어 클리프 지역의 시험 구간 1,400m가 굴착된 후 런던과 해안을 연결하는 철도 시설의 현대화가 불확실하다는 표면상의 이유를 대며 영국 정부가 공사 지원을 중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널 계획의 실현을 위한 여러 방안이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1980년대 초에는 영국 철도 회사, 프랑스 국영 철도 회사, 유로 해저 터널 그룹으로 구성된 새로운 컨소시엄이 형성되었다. 이 컨소시엄은 해저 터널 건설계획에 관한 사람들의 흥미를 새롭게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1981년 대처 수상이 미테랑 대통령과 런던에서 처음 만나 해저 터널에 대해 계속 논의하기 위해 합동 기술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후 1984년까지 영불 정부의 승인하에 두 개의 철도용 터널 건설을 위한 기술적·경제적 타당성의 합동 연구가 지속되었다.
1986년 1월 대처 수상과 미테랑 대통령이 릴리에서 건설 공사를 선포하고, 2월 12일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양국 정부는 터널 건설 허가에 관한 조약에 서명하였다. 결국 2세기에 걸친 논쟁 끝에 1987년 말 유로터널사에게 터널 건설 및 운영에 관해 55년간 이권을 주기로 하고 예비 부지 선정을 시작으로 해협 양안에서 건설 공사를 개시하였다.
터널의 구조와 건설 과정
터널의 총길이는 50.45km, 해저 부분만도 38km로 일본의 세이칸 터널(53km)에는 못 미치지만, 해저 부분은 세이칸 터널보다 23km나 길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세계 제일이다. 해저 평균 깊이 45m에 건설된 터널의 구조는 3개의 터널이 평행하게 나란히 서 있는 형태로, 유로스타가 다니는 내경 7.6m의 러닝 터널 2개와 그 사이를 지나가는 직경 4.8m의 서비스 터널 1개로 구성되어 있다. 단선 철도 노선이 설치되어 있는 주터널인 러닝 터널의 간격은 30m이며, 하나는 여객열차 전용이고, 다른 하나는 화물열차와 승용차를 실어 나르는 카트 레인용이다.
중간에 있는 서비스 터널은 터널 건설 중에는 작업원들의 현장 왕복, 자재 등을 운반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완성 후에는 유지관리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3개의 터널은 비상 사태 발생에 대비하여 매 375m 길이마다 교차 통로로 연결되어 재해 발생 시에는 서비스 터널을 이용하여 탈출할 수 있다. 또한 교차 통로는 환기 및 유지 관리용 출입구로도 이용된다. 터널 내벽은 두꺼운 콘크리트 블록으로 쌓아올려 외부의 압력에 지탱할 있도록 원형 모양을 하고 있다.
영불 해협 터널 건설에 즈음하여 최대의 기술적 과제는 얼마만큼 빨리 터널을 뚫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 정부는 정부 자금을 일체 투입하지 않은 민간 자본으로만 건설하여 운영 자금을 충당하는 방식을 채택하였으므로, 공사 기간을 가능한 한 단축시켜 빠른 시일 안에 자금을 회수하여 금리를 줄여야 했다. 이를 위하여 TBM(Tunnel Boring Machine) 또는 실드 머신(Shield Machine)이라고 불리는 최신의 굴착 기계 11대를 투입함으로써 30개월 정도에 굴착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TBM은 직경이 8m, 길이가 10m 정도 되는 둥글고 거대한 강관 형상의 굴착 기계이다.
이러한 굴착 기계를 이용한 결과 월평균 굴진 속도가 1,600 m, 해저 구간에서의 월평균 굴진 속도도 1,000m에 이르렀으며, 최대 1,200m에 달한 적도 있다고 한다. 터널 예정 노선에 있는 백악기층의 암반은 일반적으로 건조하고 안정된 지층으로 굴착에 있어서 최적 상태로 판명되었지만, 육지가 아닌 해저에서 높은 굴착 속도로 20km이상을 굴착하여야 하는 난제가 있었으므로 이를 극복함으로써 터널 굴착 공사를 예정 기간 내에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해저 터널은 영국의 섹스피어 클리프와 프랑스 칼레 해안의 상 가트 양측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따라서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상당한 차질이 초래될 수 있었다. 1993년 5월 영국과 프랑스 양측에서 굴착한 터널은 한 지점에서 만났는데, 이때 오차는 수평으로 35cm, 수직으로는 6cm 정도밖에 나지 않았다. 이를 정밀도로 환산하면 몇 1/10만로 궤도 연결시 에는 거의 오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정할 수 있는 값이었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1994년 중반에 유로 터널은 상업용으로 개통되었다. 200여년에 걸친 터널 건설의 찬반 논쟁을 끝내고 드디어 영국이 섬나라가 아닌 유럽 본토에 속하게 된 것이다. 통칭 사용되고 있는 ‘유로 터널’(Euro Tunnel)은 사업 주체인 유로터널사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공식 명칭은 영어로는 ‘채널 터널’(Channel Tunnel), 프랑스어로는 ‘Tunnel sous la Manche’라고 한다. 사실상 이 터널의 건설과 유지 관리를 전담하는 민간 회사인 유로터널사는 영불 양국 정부로부터 건설 공사 준공 후 운영 및 유지 관리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권한을 착공 시점부터 55년 동안 위임받아 관리한 후, 2042년에 양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주게 된다. 50.45km의 유로 터널은 공사계획에서 완공까지 무려 100여 년이 넘게 걸렸다.
열차용 터널 2개와 서비스용 터널 1개를 갖춘 유로 터널! 15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를 정부의 자금 지원이나 보증 없이 민간 주식공모와 은행융자로 조달하여 국가 간의 초대형 인프라 건설을 순수 민간 자본을 통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이웃나라로 영국과 프랑스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된 유로 터널! 오랜 시련을 극복하고 미래 사회의 화합을 일궈낸 지도자들의 결단력으로 세계사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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