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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스토리텔링

저서 리뷰 - [반대가 성공한 역사] 세 번째 이야기 - by 문화작가(브랜드스토리텔러) 방미영

by 청문단 2012. 5. 13.

필자가 기획, 공저했던 [반대가 성공한 역사]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세계사에 기억되는 크나 큰 사건들은 당대에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한 프로젝트들이 있습니다.

 

[반대가 성공한 역사]는 세계적으로 당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던 많은 프로젝트들이 오늘날 후대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볼 수 있는 역사적 중요한 사료입니다.

 

                                                                                                                         

 

 

 

 

루스벨트 리더십이 일군 파나마 운하

 

 

야당인 민주당의 파나마 운하 반대

 

데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 신생 파나마공화국과 체결한 조약을 상원에 제출했을 때 야당인 민주당 상원 의원들의 반대는 매우 거셌다. 상하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은 조약의 비준 권한을 상원에 주고 있다. 파나마 운하 조약 비준안이 제출된 1904년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그만큼 이 조약 비준안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가열되었다. 조약 비준을 위해서는 상원 의원 2/3의 찬성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파나마 운하 건설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1904년 1월 4일자 <뉴욕 타임스>는 파나마 운하 조약에 반대하는 상원 내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파나마 운하 조약 비준안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온 인물은 6선의 관록을 가진 앨라배마 출신 민주당 상원 의원 모건(John T. Morgan)이었다. 그는 같은 민주당 출신 상원 의원들인 컬버슨(Charles A. Culberson)과 틸만(Benjamin Tillman)의 지원사격을 받고 있었다. 금문교 혹은 후버댐 건설과 달리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외국에 건설하려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였다. 외국과 운하 건설권을 협상하고 확보하는 과정에서 파나마 운하 프로젝트의 앞날은 매우 험난해 보였다. 그리고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원래 루스벨트는 1903년 콜롬비아와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파나마는 콜롬비아 영토였다. 그런데 콜롬비아 의회는 미국과의 약속을 어기고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비준을 질질 끌고 있었다. 비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외국 영토에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루스벨트는 잘 알고 있었다. 비준이 지연되면서 운하 건설이 불투명하게 되자 콜롬비아 내의 파나마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들 주민들은 운하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콜롬비아 중앙정부의 운하 건설 지연정책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급기야 파나마 지역 지도자들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여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분리주의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쟁사가인 부트(Max Boot)는 『평화를 위한 야만 전쟁』(the Savage Wars of Peace)이라는 책에서 루스벨트와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이 파나마혁명을 선동하지는 않았지만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이들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리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을 알아차린 미국은 11월 2일 군함 ‘내시빌’(Nashville)을 파나마 해안 지역으로 급파했다. 미국 해군성은 ‘내시빌’ 지휘관에게 극비의 전문을 보내서 콜롬비아 군대가 혁명 진압을 위해 파나마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할 것을 지시했다. 이미 콜롬비아는 5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한 상태였다. 이들 병력은 미국의 방해로 파나마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했으며, 파나마로 진입했던 일부 콜롬비아 장군들과 참모들은 오히려 혁명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1903년 11월 3일 혁명가들은 지금의 파나마 수도인 파나마시티를 점령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즉시 미국은 파나마 혁명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어서 수백 명의 해병대와 수척의 군함을 파나마 지역으로 파견하여 콜롬비아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시키고 신생 파나마의 독립을 군사적으로 보장했다.

루스벨트는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확보하기 위해 속전속결로 밀어붙였다. 신생 파나마공화국을 즉시 외교적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1903년 11월 18일 그 유명한 ‘헤이-뷔노-바릴라 조약’(Hay-Bunau-Varilla Treaty)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파나마는 폭 10마일의 운하 건설 지역을 미국에 영구히 양도하고 운하 건설을 위해 더 필요로 하는 땅을 미국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그 대신에 미국은 파나마공화국의 독립을 군사적으로 보호해주기로 했다. 미국은 파나마에서의 운하 건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1,000만 달러를 제공하고 매년 25만 달러의 금화를 지불하기로 했다.

또한 파나마 운하를 프랑스 회사가 건설하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미국은 그 권리를 사들이기 위해 프랑스 회사에 4,000만 달러를 지불했다. 이 조약은 제국주의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 불평등조약의 하나로서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 체결되었다. 신생 파나마공화국 의회는 콜롬비아 의회와 달리 즉시 이 조약을 비준했다. 그러나 미국 의회 비준 과정에서 루스벨트의 파나마 운하 건설은 야당인 민주당의 반대에 직면하여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민주당 모건 상원 의원은 파나마 문제를 처리하면서 루스벨트가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했다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미국 헌법은 전쟁과 군사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애매한 규정들을 갖고 있다. 즉 대통령에게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전쟁에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반면에, 전쟁선포권은 의회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의해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권력 남용을 방지하고 불필요한 전쟁 개입을 방지한다는 취지하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의회는 전쟁 예산 승인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국익에 배치되는 전쟁에 개입하거나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남용할 경우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전쟁선포권을 활용했다.

루스벨트는 파나마 사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모건 상원 의원은 파나마 운하 조약 비준은 대통령의 권한 남용을 인정해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하면서 대통령을 비판했다. 모건은 대통령의 행위는 콜롬비아 내정에 불법적으로 개입한 것으로서 미국이 그동안 존중해온 ‘내정불간섭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모건은 굳이 파나마가 아니더라도 운하 건설 대안 지역으로 니카라과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니카라과는 자국 영토에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미국에 대해 적극적 구애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특히 모건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헌법 정신을 위배하여 군사력을 동원, 힘을 과시함으로써 대통령 재선 캠페인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 한다고 루스벨트를 비난했다.

모건 의원의 루스벨트에 대한 비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898년 쿠바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란이 시작되고 스페인과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때, 전임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은 의회에 전쟁선포 결의안을 요구하여 승인을 받고 난 후 이 전쟁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루스벨트의 파나마 문제 해결 방식은 맥킨리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의회의 전쟁선포권을 무시한 월권적 행위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건국 이후 총사령관으로서 대통령과 전쟁선포권을 가진 의회라는 이중 구조에서 오는 헌법적 논란은 최근까지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미국 대통령은 국익의 관점에서 전쟁 참전 여부를 결정하면서 때로는 의회의 동의를 구하기도 하고, 논란이 예상되거나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의회의 전쟁 동의를 구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유엔의 결의안을 집행하는 방식으로 미군 참전을 결정하면서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된 상황에 비추어볼 때, 미국 의회에 참전 승인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일어나서 결정이 지연되었을 경우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적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 의회는 1973년 전쟁권한법(War Powers Resolution)을 통과시켜 의회 승인 없이 해외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 그 기간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 법안 통과 이후에조차 미국 대통령들은 전쟁권한법에 정해진 의무를 암묵적으로 이행하면서도 자신의 대외 군사정책이 이 법에 의한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루스벨트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약속을 어긴 콜롬비아와 협상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파나마공화국 건국을 지지하는 것이 낫다는 정책적 판단을 했다. 당시 미국 의회와 사회 내부에서는 복잡한 내정 문제를 안고 있는 파나마보다는 적극적인 니카라과에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였다.

미국 상원의 경우 수십 명의 의원들이 각기 주장을 전개할 경우 파나마에 대한 결정은 빨리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대외정책에 관한 한 대통령이 확고하게 주도권을 쥐고 신속하게 결정해 나가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니카라과가 운하의 대안적 지역으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논란이 계속되었을 경우 운하 건설은 요원하다고 루스벨트는 믿었다.

파나마 사태와 관련하여 의회 지도자들에게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사전에 양해를 구해두었다면 파나마 조약 비준안은 커다란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야당인 민주당 상원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약은 대통령 대 의회의 군사적 권한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운하를 건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국익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상원 의원들을 설득했다. 남북전쟁 이후 링컨이 북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남부에서는 공화당에 대한 반감이 강했으며, 당시에는 민주당 출신 의원들이 대부분 상원 의원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화당 출신인 루스벨트에게 반대한 모건, 컬버슨, 틸만은 모두 남부 출신 민주당 상원 의원들이었다.

그렇지만 남부 지역 주민들은 파나마 운하의 건설이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커다란 이익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남부 출신 일부 민주당 상원 의원들은 주민의 압력을 받아서 운하 조약 비준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일부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파나마의 운하 조약은 상원을 통과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와 파나마 운하

 

파나마 운하는 루스벨트의 비전, 리더십, 결단력이 만들어낸 외교의 금자탑이었다. 그는 러일전쟁을 종식시킨 포츠머드 조약을 중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1906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노벨상보다는 파나마 운하 완성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외교적 업적이라고 믿었다.

루스벨트는 대선이라는 국내 정치적 목적보다는 국익 우선의 실용주의적 외교의 관점에서 파나마 운하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과는 친척으로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 법대에 진학했지만 곧 포기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루스벨트는 맥킨리 대통령 밑에서 해군성 차관보를 역임했다. 이때 그는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the Influence of Seapower upon History) 라는 유명한 저서를 쓴 마한(Alfred Mahan) 제독과 개인적 친분을 쌓았다. 마한은 이 책에서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특히 그는 파나마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루스벨트의 파나마 운하 건설은 바로 마한의 전략적 비전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이었다.

국가지도자라면 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스벨트는 미국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미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갖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전 세계지도를 놓고 볼 때 유라시아 대륙과 비교하여 북미와 남미 대륙은 제법 큰 섬에 불과했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두 대양을 끼고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미국은 해양국가로 국가전략을 세우고 미래를 열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스벨트 시대 러시아는 영토가 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서 아시아 지역까지 걸쳐 있는 전형적 대륙국가였다. 그러나 해양국가인 미국은 대양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쉽게 안보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 발달과 더불어 여타 국가들의 해군력이 증강되면서 미국의 안보는 더욱 불확실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동부와 서부를 동시에 해군력으로 방어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루스벨트에게 파나마 운하는 바로 동부와 서부를 군사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파나마 운하는 루스벨트에게 땅을 파고 물길을 내는 것 이상의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두 대양에 둘러싸여 있는 국가로서 해군력은 국가안보에 매우 중요했다. 특히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 쿠바,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공화국, 괌, 하와이, 필리핀을 미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해군력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루스벨트는 대서양과 태평양 모두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동부의 함대를 서부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파나마 운하 건설을 통해서 미국의 동부와 서부 연결시간을 엄청나게 단축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파나마 운하 건설 이후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부의 뉴욕으로 가는 데 약 8,000마일(1만 3,000km)의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었다.

하버드를 졸업했지만 루스벨트는 ‘샌님형’ 리더십이 아니라 ‘개척형’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였다.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해군성 차관보 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제1기갑 의용군 연대를 창설하여 부대 지휘관으로서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국가 위기 시에 책임을 마다하지 않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체현한 지도자였다.

그의 아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공군 조종사로 참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과 아들이 동시에 무공훈장을 받은 예는 루스벨트 부자뿐일 정도로 그의 국가관은 투철하였다.

미서전쟁 이후 그는 전쟁 영웅으로서 귀국하여 뉴욕 주지사에 선출됨으로써 정치에 대한 그의 오랜 꿈을 실현하게 되었다. 그는 맥킨리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했을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승리한 후 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1년 만에 맥킨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그는 42세의 나이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었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John F. Kennedy)는 선출된 대통령으로서는 최연소이지만 그때 그의 나이는 루스벨트보다 2살 위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의 어린이들이 모두 하나씩 갖고 있는 ‘테디 베어’(Teddy Bear)라는 곰인형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애칭에서 비롯되었다. 1902년 11월 루스벨트는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주의 국경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미시시피를 방문하여 곰사냥에 나섰다. 그런데 그날은 운이 좋지 않아서인지 곰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대통령이 상당히 실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동행인들은 지나가는 곰을 포획한 채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총을 쏘아서 잡으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대통령의 기분이 좋아져서 협상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고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루스벨트는 포획되어 있는 곰을 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이를 거부했다. 이 내용이 베리만(Clifford Berryman)이라는 작가에 의해 <워싱턴 포스트>지에 만평으로 게재되었다. 그 이후 장난감 회사들이 곰인형에 루스벨트의 애칭을 따서 ‘테디 베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인형은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팔려나갔다. 이 에피소드는 파나마 운하 건설 업적과 함께 루스벨트와 관련하여 지금도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조지 워싱턴이 1789년 미연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루스벨트 이전에는 외국을 순방한 대통령이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일 것이다. 오늘날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미국 대통령을 연상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은 1796년 워싱턴 대통령의 이임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미국 헌법은 대통령 임기 제한 규정이 없었다. 미국 국민들은 그가 계속해서 대통령직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평화로운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 두 번 대통령을 지낸 후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고 미국이 유럽 대륙 국가들의 전쟁에 휘말리지 말고 고립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신생 공화국 미국의 국력을 점진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그의 이임사는 후대 대통령들에게 가장 중요한 외교지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루스벨트는 미국 국력의 팽창과 함께 워싱턴의 외교지침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전략적 환경에 맞게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워싱턴 이후 내려오는 미국의 외교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이 요충지를 미국이 장악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1906년 루스벨트는 파나마 운하 공사 현장을 직접 방문함으로써 재임 중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루스벨트 이전까지 미국 내부에서 고립주의 전통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외교론』이라는 저서에서 고립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미국의 대외적 위상을 드높인 최초의 대통령으로 루스벨트를 들고 있다. 파나마 운하 건설은 대내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교정책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비전의 핵심은 바로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통해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양 날개로 하여 세계적 제국으로 웅비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국가들 사이의 실질적 국력 격차는 전쟁을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미국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여실히 입증되었다. 『강대국의 흥망성쇠』라는 책을 쓴 폴 케네디(Paul Kennedy)에 따르면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국가통합력이 강화되면서 19세기 말에는 모든 국력 지표에서 유럽의 모든 국가들을 앞서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루스벨트는 미국 국력의 팽창과 함께 북미 대륙에 들어앉아서 고립주의 노선을 견지할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와 국익을 위해 국제주의적 노선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정치에서 힘의 논리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큰 몽둥이를 등 뒤에 감추고, 말은 부드럽게 하라.”는 미국 속담을 즐겨 인용했다. 국제정치는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정글과 같은 곳이다. 이 정글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경우 주먹인 군사력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 국력의 증가와 함께 미국이 양 대양을 날개로 하여 세계로 웅비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설되어야 할 국가 프로젝트라는 것이 루스벨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은 일본이 I-400이라는 엄청나게 큰 잠수함을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일본은 이 잠수함을 파나마 운하를 공격하기 위해 극비리에 개발하고 있던 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태평양전쟁 중 파나마 운하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요충지로서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파나마 운하가 없었다고 한다면 일본이 하와이를 공습했을 때 미국은 대서양에 있는 함대를 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통해 수많은 군대를 태평양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었다.

운하의 군사적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미국은 운하 방어를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나마에 6만 5,000명의 군인을 주둔시켰고, 운하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수만 명의 민간인을 파견했다. 파나마 운하가 갖고 있는 이러한 전략적 유용성에 대해 루스벨트는 마한 제독과 함께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파나마 운하 건설 프로젝트는 미국에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군사적·전략적 측면에서도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루스벨트는 1904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여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해 11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파커(Alton Parker)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루스벨트와 파커는 국민투표에서 각각 56%와 37.6%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국민투표가 아니라 각 주가 갖고 있는 선거인단을 승자가 독식하는 방식으로 대선이 결정나게 된다. 선거인단의 경우 루스벨트와 파커는 각각 336명, 140명을 얻었다. 그 결과 루스벨트는 선거인단 및 국민투표 모두에서 민주당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파나마 운하 조약 비준에 반대했던 상원 의원들인 모건, 컬버슨, 틸만의 출신 주들인 앨라배마, 텍사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루스벨트가 졌다. 그렇지만 그는 북부 지역의 주들에서 민주당보다 훨씬 많은 득표를 함으로써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1904년 대선 승리를 통하여 루스벨트는 남부 상원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나마 운하 건설에 착수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여 미국이 20세기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전략적 토대를 쌓았다는 점을 인정받아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 사우스다코타 주 마운틴 러시모어 조각상에는 건국의 아버지 조시 워싱턴, 독립선언문의 작성자 토머스 제퍼슨, 남북전쟁의 영웅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루스벨트의 상이 새겨져 있다.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과 함께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의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파나마 운하 건설의 어려움

 

파나마운하 조약 비준과 함께 국내의 정치적·외교적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운하의 성공적 건설을 위해서는 극복되어야 할 기술적 문제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국가의 운명을 바꾼 프로젝트는 지도자의 신념만 갖고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미국이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인수하기 이전에 프랑스인들에 의해 운하 건설이 시도되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수에즈 운하 건설에 지대한 공헌을 한 프랑스인 드 레세프(Ferdinand Marie de Lesseps)는 파나마 운하 건설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프랑스인들은 수에즈 운하의 경험을 되살려 파나마 운하를 ‘수평식 운하’로 건설하고자 시도했다. 1880년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프랑스인들은 파나마가 수에즈와는 지리적 여건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에즈 지역은 모래와 부드러운 흙으로 된 곳이어서 15m정도만 깎으면 되었다. 그렇지만 파나마 지역은 바위 투성이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100m나 되는 고산 지역을 깎아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차그레스 강은 홍수로 자주 범람했을 뿐만 아니라 산사태도 자주 일어났다. 더구나 파나마 지역은 열대지방이어서 날씨가 습하고 더웠다. 황열병과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들이 돌아 노동자들의 근로 여건이 매우 열악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여러 다른 회사들에게 운하 건설을 맡겼지만 이러한 악조건을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운하 건설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미국은 파마나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인들이 남기고 간 장비들을 모두 인수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회사에 4,000만 달러를 제공하고 운하 건설권을 인수했다. 프랑스에 의해 중단되었던 파나마 운하 건설은 4반세기 만에 다시 미국에 의해 시작되었다.

루스벨트는 운하 건설 책임자로 스티븐스(John F. Stevens)를 임명했다. 그는 1,700마일(2,736km)에 이르는 미국 최북단에 있는 대륙횡단철도인 ‘대북부철도’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스티븐스는 프랑스인들과 달리 댐과 갑문을 건설하여 파나마 운하를 ‘수문식’ 운하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루스벨트에게 강조하고 승인을 받아냈다.

이 방식에 따르면 대서양 지역에 가툰 갑문을 만들어 거대한 인공호수인 가툰 호로 배를 들어올릴 수 있게 되고, 가툰 호에서 굴착 공사를 진행하여 쿨레브라 수로를 만들어 배가 산을 빠져나가면 태평양 연안 쪽에 있는 패드로미겔 갑문, 미라플로레스 갑문을 거쳐 바로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은 프랑스인들과 달리 거대한 산 전부를 깎을 필요 없이 굴착 공사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고 빈발했던 산사태도 막을 수 있었다. 가툰호를 건설함으로써 차그레스 강의 범람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

스티븐스는 프랑스인들이 운하 건설에 실패한 이유가 사업 착수 이전에 제대로 된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철도 건설의 경험을 살려 운하 건설에 필요한 철도 체계를 다시 만들고, 파낸 흙을 효과적으로 운반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했다. 또한 운하 근로자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하는 등 근로 조건도 크게 개선시켰다.

무엇보다도 그는 황열병과 말라리아를 퇴치하기 위해 위생적 문제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인들이 공사할 당시 열대병 때문에 근로자 3명 중 2명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따라서 이런 위생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파나마 운하 건설 공사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열대병은 생활환경이 불결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쿠바 의사 핀레이(Carlos Finlay)는 이 병이 모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믿었고, 미군 위생장교 리드(Walter Reed)는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미국은 쿠바에서 대대적인 위생 개선 작업을 전개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모기를 잡고 모기 서식지인 습지를 없앰으로써 1902년 수세기 만에 쿠바는 미군 위생부대의 도움으로 황열병과 말라리아를 완전히 퇴치할 수 있었다. 스티븐스는 고거스(William Gorgas)박사를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 위생 책임자로 임명했다. 고거스는 플로리다, 쿠바 등에서 미국이 열대병을 완전히 퇴치한 경험을 바탕으로 파나마 운하 지역에서 만연하고 있던 황열병과 말라리아를 조절하고 훌륭한 작업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고 위생환경이 개선되자 스티븐스는 자신이 철도 전문가이기 때문에 수문식 갑문에 필요한 댐을 건설할 능력은 없다고 보고 또 다른 전문가를 영입하여 운하 건설을 계속하도록 권고하면서 건설 책임자 자리를 사퇴했다. 루스벨트는 미군 공병대 책임자 괴덜스(George W. Goethals) 대령을 파나마 운하 건설 책임자로 임명했다.

파나마 운하 건설 공사의 최대의 난제는 대륙분수령을 통과하는 쿨레브라 수로를 파는 것이었다. 게일라드(David Du Bose Gaillard)소령은 수로의 측면을 터서 경사면을 줄임으로써 마침내 산사태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운하가 완공되기 1년 전 쯤이던 1913년 후반 뇌종양으로 죽었으나 그 후 쿨레브라 수로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그를 기리기 위해 쿨레브라 수로는 그의 이름을 따서 게일라드 수로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 공사에는 유럽에서 1만 2,000명, 서인도제도에서 3만 1,000명이 투입되었다. 괴덜스는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시켜 예정보다 1년 빠른 1914년에 파나마 운하 건설을 완료했다.

 

파나마 운하의 미래

 

파나마 운하는 건설 당시부터 미국 내에서 정치적 반대에 부딪혔다. 개통 이후에도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 정부에 이관 여부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면서 사실 파나마공화국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직접 운영하는 데 대해서 파나마인들은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파나마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카터(Jimmay Carter)대통령 시절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파나마와 체결했다. 결국 파나마 운하는 1999년 12월 파나마인들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미국인들은 85년간 파나마 운하를 관리하면서 냉전시대에도 공산권 선박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세계 물류 이동에 크게 기여했다. 파나마 운하 공식 문장에는 “땅은 나누어졌지만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문장의 표현처럼 파나마 운하를 통해 남미 대륙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거치지 않고도 인류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세계 교역량의 5%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있다. 수에즈운하와 함께 파나마 운하는 세계 해상 운송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2006년 현재 파나마 운하를 통과한 선박의 수는 약 1만 5,000척이며, 운하 수입은 10억 달러가 넘는다. 이 수입은 파나마 국민총생산의 7%에 해당하는 금액으로서 파나마 운하가 파나마 국민경제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은 파나마 운하 이용 상위 다섯 번째 국가로 국제교역에서 파나마 운하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파나마는 2006년 10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 찬성으로 운하 확장계획을 승인받았다. 앞으로 2014년까지 파나마는 운하 확장 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 확장 공사에는 52억 5,000만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파나마와 함께 니카라과도 대운하 건설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중미 국가들 사이에 운하 건설 경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는 양상이다.

파나마 운하는 현재 파나막스(Panamax)형 선박만이 통행할 수 있는 한계점을 안고 있다. 이번 확장 공사는 더 큰 선박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화물량 증대에 대응하고 수에즈 운하와 경쟁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파나마 운하 확장 공사에는 더욱 친환경적이고 첨단의 기술이 도입될 계획이다. 갑문에 사용되는 물들이 오염되지 않도록 별도의 저수지를 설치하지 않고 물을 정화시키고 재활용함으로써, 루스벨트의 리더십에 의해 20세기 초 건설된 파나마 운하는 21세기형 운하로 거듭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