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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영의 유비쿼터스아트 - 통섭 교육

by 청문단 2009. 7. 5.

 

 

 

요사이 논란이 되고 있는 유비쿼터스아트의 실현은 이미 1919년 독일에서 시작된다. 그란드 듀칼 색슨 예술 아카데미와 그란드 듀칼 색슨 공예학교를 합병하여 세운 바우하우스는 이미 예술과 건축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를 통합하여 설립, 유비쿼터스아트를 적용한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세운 바우하우스('건축의 집') 는 원래 '가옥 건물'이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 등 서로 다른 분야의 통섭교육을 통해 예술로 도시 건축을 새롭게 지향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당시 큰 반항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조명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바우하우스에 다니는 학생들은 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6개월 과정의 예비학습을 받아야 했다. 목공·금속공·도예·스테인드글라스·벽화·직조·그래픽·인쇄·무대연출을 다루는 실습장에서는 대체로 이론을 강조하는 예술가(조형교수라고 불렀음)와 기능인 두 사람으로부터 3년에 걸친 실습교육 후 학생들은 전문직공 자격증을 받았다고 하니 바우하우스의 교육이 얼마나 실습 위주의 실무형 교육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바우하우스의 교수 가운데에는 파울 클레(스테인드글라스·회화 담당), 바실리 칸딘스키(벽화 담당), 리오넬 파이닝거(그래픽 담당), 오스카 슐레머(무대연출 담당), 마르셀 브로이어(실내장식 담당), 헤르베르트 바이어(인쇄·광고 담당), 게르하르트 마르크스(도예 담당), 게오르크 무헤(직조 담당) 등 20세기의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기 전까지 14년 간 운영하며 독일의 현대식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바우하우스의 유비쿼터스아트적 통섭교육은 훗날 독일의 예술, 건축, 그래픽 디자인, 내부 디자인, 공업 디자인, 활판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19년 바우하우스 이후 최근 다시 유비쿼터스아트가 통섭교육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미국 제록스사의 팔로알토 연구소에 근무하던 마크 와이저 박사가 1988년에 "유비쿼터스 컴퓨팅"이라는 개념으로써 처음 유비쿼터스를 사용한 이후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인류학자 등 유비쿼터스는 이제 사회 발전을 이루는 주축으로 분류된다. 이제 우리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우하우스가 실행했던 유비쿼터스아트의 통섭교육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편리성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심미성을 외면한다면 현대 사회에서 수준높인 인간의 욕구와 소비를 이끌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유비쿼터스아트의 통섭적 접목이 이뤄낸 심미성은 미래지향적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